메뉴 메뉴
닫기
검색
 

문화

제 705 호 [기획] 식민지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다

  • 작성일 2022-05-31
  • 좋아요 Like 0
  • 조회수 6962
김지현

식민지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위 구절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한용운의 <님의 침묵> 서두 부분이다.<님의 침묵>의 특징 중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우리 나라가 식민 지배를 받고 있을 당시,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며 쓰인 작품이라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시대, 민족적 궐기와 독립을 통한 평화를 위해 다양한 시와 소설들이 등장하였고, 참혹한 시기였던 만큼 ‘문학’이라는 분야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더욱 꽃을 피워갔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당시 식민지의 수모를 겪은 다른 국가에서 역시 당시를 표현한 수많은 예술작품이 등장했다. 식민지배 속에서 피어난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보며 그 당시의 참혹함을 같이 느껴보자.



강대국의 탐욕이 불러온 모두의 아픔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는 강대국의 탐욕이 정점에 오른 시기였다. 이 무렵 산업혁명의 결과로 생산성이 크게 증대된 대부분의 유럽 열강은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이후,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의 강대국의 유럽 내 패권을 둘러싼 경쟁은 유럽 밖의 영토 확장되어갔다.


  이들은 ‘저개발 국가에 선진 문명의 축복을 준다’는 식민지 시혜론을 주장했으나, 그 배경에 깔려 있던 것은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을 정당화하는 찰스 다윈의 ‘사회진화론’식 사고였다. 이 시기의 그림들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둘러싼 복잡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 중 프랑스 화가 마네의 ‘1867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프랑스가 낳은 식민지의 비극적인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마네, 1867년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이 작품의 배경은 18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7년 6월 19일 아침, 멕시코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막시밀리안 황제와 충복 두 명이 총살당했다. 막시밀리안이 황제로 있었던 그 당시 멕시코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옹립한 일종의 괴뢰 정권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보다 산업혁명은 늦었으나 성공적인 금융정책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해 투자국으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멕시코의 채권국이기도 했다. 멕시코 정부가 채무 이행을 못 하자 나폴레옹 3세는 그것을 빌미로 침입해 자기 입맛에 맞는 정권을 세웠다. 1861년 당선된 후아레스 대통령이 엄연히 있었음에도. 멕시코를 일종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오스트리아 출신의 막시밀리안을 멕시코의 막시밀리안 1세로 황제로 세운 것이다. 


  다만, 황제의 즉위가 이루어진 후에도 멕시코 국민은 다른 나라 출신의 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타국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해 타국들은 후아레스 멕시코 대통령에 대한 지원을 늘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정세 변화와 상관없이 변치 않고 지원하겠다던 나폴레옹 3세가 독일과의 전쟁을 이유로 맥시코 내 프랑스 군에게 철군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은 말 그대로 끈 떨어진 연이 됐다. 그는 곧 멕시코군에 체포됐고 바로 사형되었다. 


  위에 그림에서 마네는 당시의 멕시코의 왕이던 막시밀리안 1세를 처형을 집행하는 멕시코 군인들의 복장을 프랑스군의 복장과 비슷하게 그려 막시밀리안을 버린 자신의 조국을 비꼬았다. 마네는 이 처형을 여러 버전으로 그렸는데, 첫 버전에는 멕시코 병사들을 멕시코의 전통 모자인 솜브레로를 쓴 모습으로 그렸으나 이후 프랑스군 스타일로 바꾸었다. 그림에 강대국이라고 불리는 프랑스에 의해 맘대로 멕시코라는 식민지의 황제가 된 막시밀리안과 강제로 새로운 왕을 받들게 되었었던, 멕시코인들의 분노와 프랑스군과 유사한 멕시코군의 형상을 통해 프랑스의 이중성을 담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타국처럼 한국 역시 식민지배 당시의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한다. 그중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이육사’의 <청포도>를 감상해보자.


▲ 1939년, ≪문장≫지에 발표된 이육사의 <청포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www.aks.ac.kr/index.do)


  이육사의 시는 독립에 대한 의지와 항일 투쟁에 대한 시이다. 다만, 이육사는 시에 직설적인 표현을 배제하고 언어적 정제를 통해 화려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며 정신적 의지를 드러내는 특징이 있었다. 그는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청포도>에서 역시 그의 의지가 드러난다. 


  시에 적힌 ‘청포도’는 단순히 “청포도가 그리워 청포도를 먹고 싶다”는 뜻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이육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였고, 시대적 측면에서 봤을 때 ‘청포도’는 ‘일제의 간섭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손님’의 의미 역시 단순히 청포도를 먹으러 오는 손님이 아닌 조국의 해방, 독립된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의 영웅들에게

  식민지배의 참혹함을 담아낸 작품들을 알아보며 당시의 상황과 끝없는 민족의 궐기를 느껴볼 수 있었다.식민지 치하에서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독과 생명적 아픔을 노래한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문학으로 고통을 승화시켜야만 했고 노래함으로써 식민지배 당시 사회적 악풍을 이겨내고자 했던 민족의 영웅들에게 또다시 감사와 존경의 찬사를 보낸다.



김채연 기자, 장원준 수습기자